1908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난 조지프 매카시는 아일랜드계 농부 집안의 7남매 중 5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4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20살에 다시 공부를 하여, 1년만에 고교 과정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27세에 위스콘신에 있는 마켓대학의 법학과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었죠. 변호사로는 별볼일 없었던 매카시는 1939년 위스콘신 판사직 선거에 출마하였고 당선되었습니다. *미국의 일부 지역은 선거로 판사를 뽑습니다.
매카시는 판사직을 수행하던 중 징계를 두 차례나 받을 정도로 판사직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1941년 판사직을 그만두고 영웅이 되려면 해병대에 입대하라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해병대 장교로 입대하기도 했습니다.
해병대 제대 이후, 매카시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합니다. 그는 1946년 선거에 상원의원으로 출마하였고, 민주당의 하워드 백머리를 후보를 이기고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상원의원 초기 매카시는 형편 없었다고 합니다. 국회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아무 곳에서 잠을 자는 모습이 더 많이 목격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나치 친위대를 칭찬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파도파도 악행만 나오는 매카시, 솔직히 그가 재선할 확률은 매우 희박했습니다.
사실상 미국의회의 ‘금쪽이’였던 매카시… 그는 많은 고민 끝에 좋은 전략을 하나 생각해냅니다. 그것은 바로 ‘반공(反共)’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2차대전 종료 후, 마오쩌둥의 신중국 수립,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등으로 인해 미국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이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미국 내 이민자가 증가한 상황에서 생긴 ‘외국인 혐오’ 분위기도 형성되어 있었죠. 매카시는 그러한 요소를 파악하여 ‘반공’이라는 카드를 꺼냈습니다.
1950년 2월 9일,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링컨의날’을 기념한 자리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여기 내 손에 20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국무장관에게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대외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해당 발언 이후, 매카시는 전국적인 인물로 자리잡았습니다. 상원의원이 미국 국무부에 침투한 공산당원 명단을 갖고있다니… 미국의 많은 미디어와 시민들은 매카시의 입만 쳐다봤습니다. 이후 매카시는 공산주의자 감별사로 활동하며 미국의 문화예술인 정치인, 공무원 등 다양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하였고 그는 곧 미국 내 최고 인기 정치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후 매카시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반미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누구든 ‘좌파 빨갱이’,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사회에서 매장시켰습니다.